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자 룩셈부르크 (문단 편집) === 공산당의 창당 === 1918년 [[독일 11월 혁명]]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기관지인 "적기(Die Rote Fahne)"를 창간하고 사민당을 격렬히 공격한다. 그해 12월 스파르타쿠스 연맹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1919년 1월 1일 [[독일 공산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로자의 노선은 당장 혁명을 일으키려 하지는 않았다. [[독일 11월 혁명|혁명]] 당시 3분의 2 이상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이 아직 사민당의 지지세력 안에 있었다. 스파르타쿠스 연맹과 로자가 사민당의 총선 제안을 반대하려 하자 대부분의 평의회들은 그 주장에 반대했다. 스스로 무장을 내려놓고 사민당과 총선을 준비하려는 평의회들을 보고 로자는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 정치적 자살을 선택했다'''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로자는 아직 독일 내 공산주의 세력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았다. 사민당은 경제적, 정치적 실패와 왕당파들에 대한 타협으로 인해 지지세를 잃고 있었고, 공산당을 사민당의 진보적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로자는 기왕 결의된 이번 선거에서 사민당에 대한 대안세력으로써의 정당을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로자와 스파르타쿠스 연맹, 공산주의 청년조직들은 12월 23일 당 창립 준비 대회에 모였고. 그녀는 거기서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들의 튼튼한 요새인 의회선거에 뛰어들어 폭풍처럼 그 요새로 들이쳐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이슈를 혁명을 위해 사용해야 하며 선거 또한 우리를 튼튼하게 만들 방법입니다. 그녀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으나 대중적 반란(봉기)를 만들어낼 토대가 신생 공산당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노동자/병사 평의회들이 건재하기에 다가올 사민당의 실책과 경제위기 속에서 독일 공산당이 전진할 수 있을것이라 본 것이다. 그 기틀을 다지기 위해 선거 여론전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만드는것이 로자의 당시 주장이었다. 그러나 12월 23일 창립대회에 참가한 수백여명의 대의원들은 대부분 [[스파르타쿠스 연맹]]이나 급진좌파 청년조직을 통해 들어와 겨우 1년도 안 되어 큰 영향을 미치고있던 레닌의 혁명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다. 대의원 대부분은 로자의 지지자였지만 적극적 선거 참가에는 반대입장을 내었고 로자 역시 큰 반대없이 공산당의 다음 투쟁노선에 찬성표를 던졌다. 실제로 그녀는 베를린에서 당을 지도하며 혁명에 지도부로써 활동하였다. 그렇다고 공산당이 선거를 아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로 다가오는 1월 19일이 총선일이었고, 여러 여론조사에서 신생 공산당은 유의미한 지지를 얻으며 의석을 얻을 것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 사건 이후에도 8석을 얻으며 시작한 공산당은 바이마르 정권 내내 50~100석 정도의 의석을 유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